他效忠的是哪一國啊?
 
 
今年是獨裁統治南韓十八年的朴正熙前總統,遇刺死亡的三十週年(1979. 10. 26.)。在他死亡三十年後,被揭發他曾經是寫血書要報效滿州國國軍的「韓奸」。

這段史實,讓韓國人覺得既荒謬又錯愕。被一個曾經背叛過自己國族的人迫害民主、蹂躪人權那麼久,雖然他自己最後遭到家破人亡的報應,但是那些被他迫害的人,絕對比他這個「叛國者」、「變節者」更忠於自己的國族、自己的土地。(朴正熙在1945年韓國解放後,曾加入南韓的共產主義組織「南朝鮮勞動黨」,並參加活動被發現而遭逮捕,但他卻因出賣其他參與軍官的名單,而存活下來。)

更讓人啼笑皆非的是,今天竟然還有無數的韓國人在緬懷他,懷念他獨裁統治時期的那段好日子。

從朴正熙之於日本帝國主義者以及自己的國人,來照映今天的台灣,不也一樣讓人錯愕嗎?因為我們真的不知道這位「台灣地區領導人」效忠的是哪一國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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版主翻譯「OhmyNews」十一月五日的報導:

韓國的「民族問題研究所」五日公開了一份最近才從日本找到的史料,那是1939年3月31日的日文「滿州新聞」的影本,新聞報導的內容證明,朴正熙前總統為了志願加入滿州國軍,曾寫血書對日本帝國宣誓效忠。

朴正熙「寫血書表忠」之說,最早是他在聞慶普通學校的同事柳增善老師的證言:「1938年5月左右,朴正熙因為超過二十歲無法進入滿州軍官學校就讀而苦惱,於是在教員值班室裡寫了血書,連信一起寄到滿州軍官學校。」(趙甲濟著:「在我的墳墓上吐口水」第二卷)佐證這個說法的史料,這是第一次被公開。

根據民族問題研究所公開的新聞報導,當時在聞慶公立普通學校擔任教師的朴正熙,志願要成為當時日本帝國傀儡國的滿州國軍官,因為超齡被刷掉,但是朴正熙並不放棄,寫了「一死以テ御奉公(讓我以死效忠) 朴正熙」字樣的血書,跟申請書以及一封懇切訴求錄取的信,再次申請1939年班的軍官。

當時「滿州新聞」在報導中說明朴正熙來信的內容,「二十九日治安部軍政司徵募課收到朝鮮慶尚北道聞慶西部公立小學訓導朴正熙君(23歲)寄來強烈志願從軍的信,信中除了戶籍謄本、履歷表、教師檢定合格證書等文件,還有寫著『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的血書,讓收到信的承辦員大為感動。」

朴正熙在信中展現了要當滿州軍官的積極心態:「身為日本人,要以無所恥的精神與氣魄,下定『一死奉公』的堅強決心。」「做為一名滿州國軍,只為滿州國,也為祖國日本,不求一己的任何榮達。決心善盡犬馬的忠誠,滅私奉公。」

「滿州新聞」報導說,「由於限定擁有軍籍者才能成為軍官,而且進入軍官學校的資格年齡是十六歲以上至十九歲,他已經二十三歲,年紀太大,雖很可惜,也只能鄭重謝絕。」而使朴正熙第二度志願從軍仍未能成功。

但是朴正熙經過第三度嘗試之後,終於在1940年4月進入了新京軍官學校預科課程接受軍事教育,然後在1942年10月,以成績優異編入日本陸軍士官學校本科三年級,而實現了夢想。1944年12月,他被編入日本軍預備役少尉,同時被任命為滿州軍步兵少尉,到日本戰敗之前,他是滿州軍中尉。

民族問題研究所說:「朴正熙的兒子朴志晚在十月二十六日提出『禁止刊載』的假處分申請之後,基於『親日人名辭典』出版的本質已經走調,加上可能會成為政治的爭議焦點,所以在今天公布這段史料。」「與此相關的媒體報導發出之後,研究所就不斷接到粗言辱罵的電話,甚至已對業務造成影響。」

研究所相關人士表示,「客觀紀錄朴正熙自己言行的史料真跡,不應該因為公開而遭致爭議的擴大,應該轉化成為為理性討論的契機。」

朴志晚四日再向首爾北部地方法院提出追加與變更假處分理由,除了「禁止刊載」還增加「禁止流傳(發行)」。

如果法院接受朴志晚申請的話,已經印刷完成的「親日人名辭典」,將無法對一般韓國國民公開發行,原計畫在八日舉行的新書發表會也很可能取消。法院方面先前表示會在發表會之前完成審理,最後的決定備受矚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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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9. 11. 05.

민족문제연구소는 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지원하며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내용의 혈서를 썼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최근 일본에서 입수한 박정희 혈서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 만주신문 > 사본이다.

박정희 혈서설은 "1938년 5월경 학교 숙직실에서 만주군관학교 입학적령 20세에 걸려 고민하는 박정희가 혈서를 써서 편지와 함께 만주군관학교에 보냈다"는 문경보통학교 동료교사 유증선의 증언(조갑제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 > )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해당 기사에 따르면, 당시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박 전 대통령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다가 연령 초과로 1차 탈락하자 포기하지 않고 지원 서류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채용을 간곡히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1939년 군관에 재차 지원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 만주신문 > 은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23)군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며 박 전 대통령의 편지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편지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밝히는 등 만주군 임관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를 드러내고 있다.

< 만주신문 > 은 이어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며 박 전 대통령의 두 번째 만주국 군관 지원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세 번째 시도 끝에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는 등 '꿈'을 이룬다. 박 전 대통령은 이후 1944년 12월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군 보병소위로 임관해 일제 패망 직전까지 만주군 중위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지난 10월 26일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이날 자료를 공개한다"며 "이와 관련한 언론 보도가 나간 후 연구소에 끊임없이 욕설·폭언을 하는 전화가 끊이지 않아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 자신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원사료를 공개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박지만씨는 4일 서울북부지법에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에 배포금지 사유를 추가해 청구취지 및 원인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법원이 지만씨 측의 결정을 받아들일 경우 인쇄가 이미 끝난 친일인명사전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게 돼 8일로 예정된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법원은 앞서 국민보고대회 전까지 심리를 끝마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어 최종 결정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