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염헌(張炎憲) 관장을 회상하며
 
 
장염헌(張炎憲) 관장을 회상하며

주립희(朱立熙)

나는 주말 동안 고웅(高雄)에서 있었던 6시간의 수업 때문에 장염헌(張炎憲) 관장의 추도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에게 애도를 표하지 못해 마음이 심히 무겁고 유감스럽다. 다른 역사학계의 선배들과 비교하면 나와 관장의 사이는 그렇게 긴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미디어계를 떠난 이후 8년 간의 인생역정을 변화시켰고, 나를 인권영역에 끌어들인 중요한 사람이었다. (수업이 마친 뒤 잠시간의 시간을 얻어 이 짧은 글을 쓴다. 모두의 양해를 부탁 드린다.)

2006년 6월 하순으로 돌아가 보자.

국영 중화텔레비젼공사(中華電視公司) 부사장를 떠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던 무렵, 나는 책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의 번역을 갓 끝낸 상황 이었다. 몇 차례의 강연 요청을 받고 동시에 또 하나의 번역할 책을 찾고 있었던 때다. 어느 날 저녁 생각지 못하게 장 관장의 전화를 받았다. : “입희형, 저는 장염헌입니다! 이소봉(李筱峰)교수의 소개로 주 선생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듣기로 당신은 대만 유일의 한국전문가라고 하던데, 한국 광주사건의 진상과 과거청산을 밝혀주는 논문을 한 편 써주실 수 있는지요? 내년은 228사건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신을 학술토론회에 초청하고 싶습니다.”

“저는 광주사건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깊은 연구를 한적이 없어요. 저는 반드시 처음부터 공부를 해야 할 겁니다. 논문을 길게 써야 하나요?”. “2만자 정도면 되나요?”.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죠.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길 희망합니다.” 결국 나는 이 도전을 받아들이게 됐다. 이 한 통의 전화는 나를 물러설 수 없는 인권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당시 광주사건에 관한 중국어 자료는 상당히 제한됐었다. 어떤 문헌들은 중국대륙의 좌파가 주장하는 담론를 인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광주인민의 항쟁을 공산주의의 계급투쟁 사관으로 해석한 것이다. 울 수도 웃지도 못하는 이런 상황에 나는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반드시 이 논문을 제대로 쓰리라 결심했다.

이후 나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의 자료를 백만 자 이상 탐독했고, 대체적인 맥락을 정리했다. 8월 말에는 직접 광주에 답사를 갔고, 한국어로 된 1차 사료 일부를 대만으로 가지고 왔다. 그 해 12월까지 나는 논문작성을 해 나갔고, 결국 2만 자가 9만 자가 됐다. 나는 정말 이 논문을 한 권의 책으로 쓰려 했다.

이 책을 쓰는 반년의 기간 동안 나는 세 차례나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나의 부친이 세상을 하직했을 당시처럼). 첫 번째는 광주시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대목을 읽을 때였다. 한국에는 어쩌면 이토록 인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군사독재가 있었을까? 나는 광주사람들의 희생을 기리며 울었다; 두 번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데즈먼드 투투(Desmond Mpilo Tutu) 대주교가 쓴 책 『용서 없이 미래 없다』를 읽게 되면서, 넬슨 만델라의 포부에 대해 마음에서 탄복하며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대만의 2.28을 반성하면서
대만인의 나약함, 무능, 타협성에 슬픈 눈물을 흘렸다.

집필이 끝난 후, 나는 다시 한국에 가서 3개의 한국인권단체에게 2.28사건 60주년의 국제토론회와 기념활동에 귀빈으로 참석해 주십사 하고 요청했다. 여기에는 ‘5.18기념재단’의 이사장 이홍길 교수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의 상임위원 김영택 박사, ‘제주 4.3연구소’ 소장 이규배 교수 등이 포함된다. 이 방문에서 그들은 2.28사건이 대만사회에 준 충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귀빈이 대만을 떠나기 전 ‘5.18기념재단’은 2.28기금회와 ‘교류협력을 위한 MOU’체결을 먼저 제시했고, 제주4.3연구소도 이에 참여코자 했다. 그래서 2007년 5월 중순 2.28대표단은 제주 및 광주에서 MOU를 체결했고, 2.28의 국제교류의 첫 발 뻗어갔다.

이 때 한국을 방문한 구성원은 2.28기금회의 이사장과 장염헌 관장 등이 있었고 나는 단체 가이드 겸 통역의 역할을 했다. 두 분의 장곤급 인물과 더불어 주한국 타이베이 대표부도 참사관을 파견해 제주와 광주에서 동석했다.

이 한국방문의 성과는 풍성했다. 게다가 나는 ‘한겨레’신문에서 반 면에 걸쳐 인물소개가 됐다.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모두 신문을 보며 칭찬을 했고, 당연히 어떤 이들은 질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장 관장의 표정을 보니, 그는 그의 대표적인 미소를 띠며 굉장히 흡족해(혹은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사람을 잘 봤다’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해 나는 다시 장 관장과 이승웅(李勝雄) 인권 변호사를 대동하고 제주도를 찾아 4.3 대학살 60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했다. 이 제주행으로 나는 그와 비교적 깊은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 그날 이홍길 교수와 저녁 만찬을 가진 이후 우리 셋은 그의 호텔방에서 다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장염헌 관장은 일본에 유학한 경험을 통해 ‘일본인의 한국관’을 가지고 한국을 대했다. 그러나 이 두 차례의 한국 인권 여행 이후, 나는 그가 한국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흡수력 및 기존의 관념과 편견을 수정하는 학문적 태도에 나는 감탄했다.

그 후 광주사건을 다루는 〈화려한 휴가〉를 몇 차례 방영할 때, 그는 굉장히 열심히 감상했다. 동세농장(東勢農場)에서 거행된 2.28사건 관심 총회의 집회에서 그는 나를 붙잡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저 군인역할은 노태우인가?”. 백 여 번의 방영 동안 이토록 꼼꼼하게 감상하며 인상을 준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오래지 않아 나는 2.28기금회 이사로 임명 됐고, 매달 한 두 차례 그와 함께 회의를 개최・토론했다. 그는 언제나 적절하게 일을 처리했고, 자신의 견해를 조리 있게 진술했다. 나 또한 광주사건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2.28사건의 연구와 이해에 열중했다.

실로 송구스럽지만, 원래 나는 2.28사건에 대해 얄팍한 인지밖에 없었다. 뜻밖에도 광주사건을 인식하게 되면서 다시 내 나라의 인권비극에 대해 반성할 수 있었다. 먼저 ‘국제화’가 했다가 ‘본토화’로 전환된 것이다. 내게 이러한 자아인식의 기회를 준 사람이 바로 장염헌 관장이다.

장 관장은 보기 드물게 큰 도량을 가진 사람이었다. 함부로 사람을 대하지 않았고, 영욕을 온 몸으로 삼켜왔다. 그는 비방과 칭찬을 괘념치 않고 역사기록을 대만에 남기기 위해 일평생 온 힘을 다 했다. 비록 늦게 서로를 알았고 서로를 알아간 시간도 길지 않았지만, 그는 내게 전화를 걸 때면 언제나 겸손한 말투로 “Lip Hee Hya(立熙兄),Li Her(你好)!Wa Yam Hen La(我炎憲啦)!”(입희형! 안녕하세요! 저 염헌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람을 적재적소에 쓸 줄 알고, 나를 인권운동의 길로 인도해 주었으며, 나의 과거 8년 간의 인생을 바꾼 선배에게, 최고의 경의와 공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장 관장, 당신은 너무 고생이 많았소. 하느님이 당신을 이처럼 이르게 휴식을 취하게 한 것은 더 많은 새로운 세대의 각성이 되었소. 당신에게 한 잔 올리겠소! 그날 밤 우리의 제주도에서 처럼.”

(대만국사관 전 관장 장염헌 교수는 2014년 10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구술사 인터뷰 당시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